넷플릭스에 올라온 휴민트. 시간가는줄 모르고 봤고, 기존 배우때문에 생긴 악감정이 있었지만, 재밌게 봤다. 휴민트를 보는걸 망설이고 있는분들이 있다면 속는셈 치고 한번 봐도 좋을것 같다.

첩보 배경 — 휴민트(HUMINT)라는 설정이 만들어내는 세계
이 영화의 제목이자 핵심 개념인 휴민트(HUMINT)부터 짚어야 합니다. 여기서 HUMINT란 Human Intelligence의 약자로, 위성이나 신호 감청이 아닌 사람을 직접 활용해 정보를 수집하는 첩보 방식을 의미합니다. 드론도, 해킹도 아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와 배신으로 작동하는 세계입니다.
영화는 국정원 조 과장이 정보원으로 운용하던 북한 출신 여성이 눈앞에서 숨지는 장면으로 출발합니다. 이 사건이 동기가 되어 그는 북한 국경 인신매매의 진원지인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하고, 그곳에서 북한 국가보위성 요원 박건과 영사관의 황치성이 이미 얽혀 있다는 사실을 마주합니다. 배경 자체가 냉전 스파이물과는 결이 다릅니다. 제가 직접 보면서 느낀 건, 이 영화가 첩보 장르의 외피를 쓰되 인신매매라는 실제 존재하는 문제를 정면으로 건드린다는 점이었습니다.
다만 솔직히 말하면 첩보 장르로서의 밀도는 기대보다 얇습니다. 호텔 CCTV가 허술하게 뚫리거나, 감시망을 따돌리는 장면이 너무 쉽게 해결되는 등 인텔리전스 작전의 디테일이 느슨한 편입니다. 여기서 인텔리전스 작전이란 첩보 요원이 신분을 숨기고 표적을 감시하거나 정보를 빼내는 일련의 과정을 뜻하는데, 그 치밀함보다는 감정선에 더 많은 무게를 싣는 영화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영화 구성 비율을 굳이 따지자면 첩보 20%, 멜로 40%, 액션 40% 정도입니다. 이 점을 알고 들어가면 오히려 부담이 없고 더 편하게 즐길 수 있습니다.
액션 연출 — 류승완 감독이 이번에 한 단계 올린 것들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을 하나만 꼽으라면 주저 없이 액션 시퀀스라고 하겠습니다. 조인성이 롱코트를 입고 권총을 역방향으로 잡아 둔기처럼 사용하는 장면은 설정을 심고 나중에 정확히 회수하는 셋업-페이오프 구조로 짜여 있습니다. 셋업-페이오프란 앞에서 특정 행동이나 소품을 보여주고 후반부에서 그것이 결정적 역할을 하도록 연결하는 서사 기법인데, 액션 장르에서 이 구조가 작동하면 관객의 쾌감이 두 배로 올라갑니다.
핸드헬드 카메라와 짧은 컷 편집이 결합된 격투 장면은 타격감과 스피드가 살아 있어서 "한국 영화도 이 정도 액션이 가능하구나"라는 감탄이 자연스럽게 나왔습니다. 조인성의 길쭉한 프로포션이 이 스타일의 액션과 잘 맞아떨어진다는 것도 보면서 처음 알았습니다.
박정민의 존재감도 주목할 만합니다. 북한 보위성 요원 박건 역할을 맡은 그는 발차기, 총기 사용, 근접 격투를 모두 소화하는데, 솔직히 이번 영화에서는 캐릭터 박건보다 배우 박정민이 더 보이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멜로 장면에서 감정이 스며들기 전에 박정민의 에너지가 먼저 튀어나오는 느낌이랄까요. 아이러니하게도 이 역할을 이 수준으로 해낼 수 있는 배우가 현재 한국 영화판에서 박정민 외에 많지 않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류승완 감독의 액션 연출이 돋보이는 포인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셋업-페이오프 구조로 설계된 소품 활용 (권총을 둔기로 쓰는 장면)
- 핸드헬드 촬영과 짧은 컷으로 완성한 현장감 있는 격투 시퀀스
- 후반부 구출 시퀀스에 집중된 클라이맥스 설계
- 미장센과 실내 조명을 활용한 시각적 완성도
류승완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 스플릿 포커스 디오프터라는 특수 렌즈 기법도 활용했는데, 이는 화면의 전경과 후경을 동시에 선명하게 포착하기 위해 렌즈 앞에 반쪽짜리 클로즈업 렌즈를 부착하는 방식입니다.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이 즐겨 쓴 기법으로 알려져 있고, 영화 전반에 걸쳐 시각적 긴장감을 높이는 데 기여합니다.
홍콩 누아르 — 이 영화가 진짜 오마주하는 것
세 번째 소제목에서 이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가 있습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저는 "류승완 감독이 홍콩 누아르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단순한 영향을 넘어서 이번 작품은 역대 그의 필모그래피 중 홍콩 영화의 문법이 가장 짙게 녹아든 작품입니다.
홍콩 누아르란 1980~90년대 홍콩 영화의 한 장르로, 오우삼·두기봉 감독 등이 주도한 장르입니다. 서로 적대적이었던 두 인물이 같은 목표를 향해 함께 움직이는 쌍남 구조, 총구를 서로 겨누며 정적이 흐르는 트라이앵글 스탠드오프, 등을 맞댄 채 사방으로 총을 쏘는 아이코닉한 장면들이 특징입니다. 트라이앵글 스탠드오프는 세 인물이 서로에게 동시에 총을 겨누는 긴장 국면을 뜻하며, 오우삼의 영웅본색이나 두기봉의 엑자일 같은 작품에서 명장면으로 기억되는 문법입니다.
휴민트에서 하얀 옷을 입은 인신매매 피해자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장면은 영웅본색의 비둘기를 연상시키는 대체 이미지처럼 읽혔고, 방탄유리 안에 갇힌 여성들을 이용한 액션 기믹이나 잘생긴 금발 외국인 악당 캐릭터는 성룡 영화의 톤과 닮아 있습니다. 마지막 남녀가 포개진 장면에서는 진목승 감독의 천장지구가 떠오를 정도였습니다.
한국영화진흥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2020년대 들어 한국 액션 영화의 해외 수출 비중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으며, 특히 OTT 플랫폼을 통한 글로벌 동시 공개가 장르 영화의 새로운 유통 경로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휴민트는 홍콩 누아르라는 검증된 문법을 현재 한국 액션 영화의 방식으로 재조립한 시도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다만 이 홍콩 영화적 타이밍과 리듬이 모든 관객에게 통할지는 미지수입니다. 컷이 들어가고 나오며 대치 국면이 해소되고 다시 액션으로 점화되는 이 흐름을 어떤 관객은 경쾌하다고 느끼고, 어떤 관객은 낯설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만큼 다양한 연령대가 접근하기 쉽다는 점은 장점이지만, 젊은 관객층이 이 문법에 얼마나 반응할지는 개인 취향에 따라 갈릴 것 같습니다.
OTT 플랫폼의 장르 영화 소비 패턴을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관객들은 극장 대비 OTT에서 장르적 실험성이 높은 작품에 더 열린 반응을 보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점에서 휴민트의 넷플릭스 공개는 영화의 특성과 잘 맞는 선택이라고 봅니다.
정리하면 이 영화는 첩보 액션 멜로라는 세 축 위에 홍콩 누아르의 문법을 얹은 작품입니다. 세 가지를 동시에 잡으려다 어느 것도 완벽하지 않은 경우가 생기기 마련인데, 액션 하나만큼은 흔들림 없이 완성도를 지킵니다. 후반부 박정민이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냐"고 묻는 장면에서 제 가슴이 먹먹해졌다는 건, 이 영화가 단순히 화면을 때리는 것 이상을 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액션 영화를 좋아하신다면 망설일 이유가 없습니다. 굳이 액션 취향이 아니더라도 배우들의 연기와 연출이 충분히 끌어당기는 힘이 있으니, 넷플릭스에서 부담 없이 시작해 보시길 권합니다. 류승완 감독이기에 가능한 영화라는 말이 이번에도 유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