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끝나고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성형 광고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보러 올라갈 때는 그냥 지나쳤던 광고인데, 내려올 때는 완전히 다르게 보였습니다. 코랄리 파르자 감독의 서브스턴스는 그런 영화입니다. 보고 나서 일상이 달리 읽히기 시작하는, 생각보다 훨씬 오래 남는 작품입니다.

대사보다 화면이 먼저 말한다 — 시각언어의 설계
서브스턴스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지점은 이야기를 말로 풀지 않는다는 태도였습니다. 오프닝부터 그렇습니다. 달걀 노른자에 약물을 주입하자 노른자가 하나 더 생기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아무런 설명도 대사도 없습니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관객 스스로 맥락을 구성해야 하죠.
여기서 핵심적으로 작동하는 것이 시각언어입니다. 시각언어란 대사나 내레이션 없이 화면의 색, 구도, 카메라 움직임만으로 이야기와 감정을 전달하는 영화적 방식을 말합니다. 서브스턴스는 이 방식을 거의 전면적으로 채택합니다.
색채 설계도 정교합니다. 엘리자베스가 주체인 장면에서는 파란색 계열이 주색으로 사용되고, 젊은 수가 등장하는 공간에는 분홍색이 깔립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가 약물을 찾으러 갈 때 노란 코트를 걸치는데, 이 노란색은 두 정체성 사이의 중간 지점을 표시하는 색으로 읽힙니다. 신호등의 황색등처럼, 무언가를 결정하기 직전의 심리 상태를 색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프레이밍의 변화도 주목할 만합니다. 프레이밍이란 화면 안에 피사체를 어떻게 배치하고 얼마나 담을지 결정하는 구도 기법을 말합니다. 엘리자베스가 부엌 의자에 앉아 있는 장면을 보면, 오른쪽엔 그녀의 젊은 시절 액자가 잡히고 왼쪽엔 통유리 바깥 풍경이 보입니다. 작품이 진행될수록 이 두 프레임의 비율이 달라지는데, 그녀가 자기 정체성을 잃어갈수록 젊은 시절 사진을 담는 프레임이 점점 작아지다 결국 사라집니다. 한 인물의 자아 붕괴를 대사 한 마디 없이 구도 변화만으로 보여주는 방식이 저한테는 꽤 충격적이었습니다.
욕망이 과잉될 때 일어나는 일 — 과잉의 구조와 의미
서브스턴스를 보면서 저는 이 영화가 욕망 자체를 문제 삼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젊어지고 싶은 것, 맛있는 걸 먹고 싶은 것, 아름다운 걸 보고 싶은 것. 이것들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인간의 욕구입니다. 감독이 겨냥하는 건 이 욕구가 산업과 결합하면서 끝을 모르고 팽창할 때 생기는 왜곡입니다.
영화 속 '과잉'은 세 가지 방향으로 동시에 표현됩니다.
- 신체 과잉: 수의 에어로빅 방송에서 카메라는 엉덩이와 골반을 과장된 광각 렌즈로, 지나치게 오래 클로즈업합니다. 이 시선 자체가 이미 하나의 비평입니다.
- 음식 과잉: 하비가 새우를 집착적으로 발라 먹는 장면과 엘리자베스가 수의 방송을 보며 폭식하는 장면이 연달아 등장합니다. 먹는 소리가 과장 처리되어 있어서 보는 것 자체가 불쾌합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단순 혐오 유발이 아니라, 욕망의 불쾌함을 소비 행위로 등치시키는 연출이었기 때문입니다.
- 젊음에 대한 과잉: 서브스턴스 약물은 스마트폰 같은 패키징으로 포장되어 소비재처럼 제시됩니다. 이 설정 하나로 젊음을 사고파는 미용·의료 산업에 대한 감독의 시선이 명확해집니다.
이 세 가지는 표면적으로 달라 보이지만 본질은 같습니다. 균형을 잃은 욕망이 어떤 형태로 발현되든, 결국은 소비자도 소비 대상도 망가뜨린다는 것입니다. 영화가 반복하는 대사가 "균형을 유지하라"인 것도 그래서입니다. 실제로 미디어 연구에서도 미디어가 특정 외모 기준을 반복 노출할수록 수용자의 신체 이미지 왜곡이 심화된다는 결과가 보고된 바 있습니다.
거울과 카메라, 두 개의 시선이 충돌하는 클라이맥스
서브스턴스의 엔딩이 두 번으로 나뉘는 구조를 두고 "늘어진다"는 반응도 있는데, 저는 이게 사실 의도된 이중 구조라고 봅니다. 영화 전체가 두 가지 테마를 병렬로 진행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자기 자신을 어떻게 보는가'이고, 다른 하나는 '미디어가 나를 어떻게 소비하는가'입니다.
첫 번째 클라이맥스는 거울 앞에서 수가 엘리자베스를 폭행하고 결국 그 얼굴로 거울을 깨는 장면입니다. 서브텍스트가 매우 명확한 장면인데, 서브텍스트란 대사나 행동의 표면 아래에 숨겨진 실제 의미나 감정을 말합니다. 혐오의 진짜 대상이 외부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음을 거울을 깨는 행위로 드러냅니다.
두 번째 클라이맥스는 새해 전야 쇼에서 몬스트로 엘리자 수가 관객석에 피를 분사하는 장면입니다. 이건 캐리(1976)의 엔딩이나 이글로리어스 바스타즈(2009)의 극장 신과 비교되기도 하는데,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캐리와 바스타즈에는 분노가 향하는 명확한 적이 있습니다. 반면 서브스턴스의 객석에는 합의와 제작자도 있지만 단순히 쇼를 즐기러 온 일반 관객도 섞여 있습니다. 이 모호함이 불편한 이유는, 감독이 미디어를 소비하는 우리 모두를 그 공간 안에 포함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보는 내내 불편했던 게 바로 이 지점이었습니다.
청소부가 별을 밟지 않은 이유 — 감독이 숨긴 정서의 온도
서브스턴스를 단순히 과격한 바디호러 장르로만 읽으면 놓치는 장면들이 있습니다. 바디호러란 신체의 변형, 훼손, 붕괴를 통해 공포와 불안을 유발하는 장르를 말합니다. 이 작품은 분명 그 장르 안에 있지만, 동시에 감독이 곳곳에 섬세한 정서적 온도를 심어 놓습니다.
달력에 엘리자베스로 사는 날에는 X 표시를 하고, 수로 사는 날에는 '수'라고 이름을 적는 장면이 그렇습니다. 나이든 자신을 지워버리듯 표시하는 이 행동 하나가 인물의 심리 상태를 이론보다 훨씬 정확하게 전달합니다. 채널을 바꾸는 소리에 맞춰 밤의 야자수와 낮의 야자수를 교차로 보여주며 그녀가 얼마나 긴 시간을 홀로 TV 앞에서 보냈는지를 단 두 컷으로 처리하는 방식도 좋았습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 청소부가 등장하는 장면. 신체 잔해를 청소기로 밀어내면서도 엘리자베스의 별만큼은 큰 보폭으로 넘어가는 이 작은 행동이 저한테는 생각보다 오래 남았습니다. 영화 내내 밟히고 무시당하고 소비되던 그 별 하나를 굳이 피해 걷는 청소부의 몸짓. 감독이 이 인물을 통해 아주 조용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무언가를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미디어 리터러시 관점에서 이 작품을 보면 또 다른 층위가 보입니다. 서브스턴스는 미디어가 어떻게 특정 신체를 상품으로 가공하고 소비시키는지를 과장된 방식으로 가시화합니다. 이 과장이 불편하게 느껴진다면, 그건 이미 그 메시지가 전달됐다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미디어의 외모 편향적 재현이 수용자의 자기 인식에 미치는 영향은 다수의 미디어 연구에서 지속적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서브스턴스는 보고 나서 뭔가를 정리하기가 쉽지 않은 영화입니다. 자극적이고 과격하지만 그 과격함이 허투루 쓰이지 않고, 감독이 하고 싶은 말 위에 정확하게 얹혀 있습니다. 시각언어와 색채 설계를 꼼꼼히 뜯어보면서 보면 단순 공포 영화로 소비하기엔 너무 정교한 작품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아직 안 보셨다면, 엘리베이터 내려올 때 주변 광고를 한번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