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하게 지내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연락을 끊어버린 경험, 한 번쯤은 있지 않으신가요? 이유도 모른 채 멀어진 관계를 붙잡아야 할지 놔줘야 할지 몰라 한동안 머릿속이 복잡했던 기억이 저도 있습니다. 영화 이니셰린의 밴시를 보고 나서 그 감각이 고스란히 되살아났습니다.

씨네큐브에서 처음 마주한 영화
혹시 멀티플렉스가 아닌 다양성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신 적 있으신가요? 저는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사실 그런 공간을 제대로 경험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씨네큐브는 독립영화나 예술영화 계열을 주로 상영하는 다양성 영화관입니다. 여기서 다양성 영화관이란 상업적 배급망에 편입되기 어려운 작품들을 꾸준히 틀어주는 소규모 상영관을 의미하며, 국내에서는 씨네큐브나 인디스페이스 등이 대표적입니다.
직접 가보니 분위기 자체가 달랐습니다. 광고 없이 정시에 시작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불이 켜지지 않습니다. 처음엔 당황했는데 오히려 그게 영화의 여운을 더 오래 붙잡아두는 느낌이었습니다. 좌석 수도 200~300석 규모의 소극장이라 스크린이 작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관객석과 스크린 사이의 거리가 짧아서 몰입감은 전혀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이니셰린의 밴시는 감독 마틴 맥도나의 작품입니다. 쓰리 빌보드와 킬러들의 도시로 국내에도 꽤 알려진 감독이고, 제가 이 영화를 보고 나서야 왜 그가 콜린 파렐을 페르소나로 쓰는지 뒤늦게 이해했습니다. 여기서 페르소나(Persona)란 감독이 자신의 작품 세계를 구현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기용하는 배우를 가리키는 영화 용어입니다. 팀 버튼과 조니 뎁, 봉준호와 송강호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보면 됩니다. 이 영화에서 콜린 파렐은 평소의 카리스마 있는 이미지를 완전히 내려놓고 어리숙하고 소박한 남자를 연기하는데, 그 낙차 자체가 큰 충격이었습니다.
절교 선언이 불러온 해석의 갈래
줄거리만 들으면 단순합니다. 아일랜드의 작은 섬 이니셰린에서 오랫동안 절친으로 지내던 두 남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나이 든 남자가 이유도 설명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절교를 선언합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단순한 이웃 간의 갈등으로만 보기에는 배경이 의미심장합니다. 아일랜드 내전(Irish Civil War)이 배경입니다. 아일랜드 내전이란 1922년부터 1923년 사이에 아일랜드 자유국 임시정부 군과 반조약파 IRA 사이에 벌어진 무력 충돌을 가리킵니다. 영국과의 협상을 받아들이자는 쪽과 완전한 독립을 주장하는 쪽이 갈라서서 싸운 내전이죠. 이 시대적 맥락을 두 주인공에게 대입하는 해석이 있고, 그것도 꽤 설득력이 있습니다.
제가 처음 영화를 볼 때는 아일랜드 내전을 전혀 몰랐습니다. 대신 한국전쟁을 머릿속에 떠올리면서 봤습니다. 어릴 때 "옛날엔 남북한이 한민족이었다"고 배웠지만, 정작 그 이후의 역사를 보면서 '왜 같은 민족끼리 이렇게까지 싸워야 하는가'라는 의문이 떠나지 않았거든요. 이 영화의 두 주인공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관객은 그들이 절친이었다는 사실을 말로만 전달받을 뿐, 실제로 함께 웃고 떠드는 장면은 거의 볼 수 없습니다. 그러니 싸움이 깊어질수록 관객은 더 긴장하게 됩니다. 뭔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이 내내 떠나지 않죠.
희곡 작품에 비유하자면, 7차 교육과정에 실렸던 오태석의 희곡 들판에서에서 측량기사가 두 형제를 이간질해놓은 이후부터만 보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습니다. 과거의 화목함은 기억 속에만 존재하고,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건 점점 극단으로 치닫는 갈등뿐입니다.
이 영화에서 주목해야 할 핵심 요소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나이 든 바이올린 연주자의 절교 선언: 남은 시간에 가치 있는 것을 남기고 싶다는 절박함에서 비롯된 선택
- 젊은 남자의 집착: 이유를 알고 싶고 관계를 되돌리고 싶은 인간적인 욕구
- 여동생과 동네 바보의 개입: 각자 다른 방식으로 갈등에 개입하며 상황을 예측 불가능하게 만드는 서브 내러티브(sub-narrative)
- 아일랜드 내전이라는 배경: 섬 밖에서 들려오는 포성이 섬 안의 갈등과 묘하게 공명하는 구조
서브 내러티브란 주된 이야기 흐름 외에 부차적으로 전개되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뜻합니다. 이 영화에서는 여동생과 동네 바보의 이야기가 단순한 조연에 그치지 않고 주인공들의 갈등을 다각도로 비춰주는 역할을 합니다.
아카데미 9개 부문 노미네이트, 그래도 무관
이 영화가 아카데미 시상식(Academy Awards)에서 9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아카데미 시상식이란 미국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MPAS)가 매년 수여하는 영화상으로,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영화 시상식 중 하나입니다(출처: AMPAS 공식 사이트).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콜린 파렐), 남우조연상, 여우조연상 등 주요 부문에 고루 이름을 올렸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9개 부문 후보, 수상은 0개였습니다. 솔직히 저도 이게 너무 아쉬웠습니다. 주연상과 조연상, 작품상까지 기대했는데 모두 빈손으로 돌아갔습니다. 그해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가 워낙 강력했던 탓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콜린 파렐의 연기만큼은 충분히 받을 자격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영화 비평 분야에서 흔히 쓰이는 개념 중에 미장센(Mise-en-scène)이 있습니다. 미장센이란 화면 안에 배치되는 모든 시각적 요소, 즉 배우의 위치, 조명, 색감, 소품 등을 의도적으로 구성하는 방식을 뜻합니다. 이 영화는 아일랜드의 황량하고 광활한 자연 풍경을 미장센으로 활용하면서, 두 인물의 단절된 감정을 시각적으로 극대화합니다. 국내 영화 연구자들도 이 영화의 공간 활용을 높이 평가한 바 있으며, 아일랜드 관광청이 이 영화의 촬영지인 아란 제도를 공식 홍보에 활용할 정도로 배경 자체가 강렬한 인상을 남깁니다(출처: 아일랜드 관광청).
제가 직접 보면서 특히 놀랐던 건 서스펜스의 방향이었습니다. 카체이스나 폭탄 해제 같은 액션이 전혀 없는데도, 이 네 명의 캐릭터가 5분 뒤에 무슨 행동을 할지 도무지 예측이 되지 않아서 손에 땀을 쥐게 됩니다. 그게 오히려 더 무섭고 더 긴장됩니다. 어쩌면 그게 현실과 가장 닮은 공포인지도 모릅니다.
결국 이 영화는 정답을 주지 않습니다. 나이 든 남자의 선택도 틀리지 않고, 젊은 남자의 집착도 이해가 됩니다. 어느 쪽이 옳은지 판단하기보다는, 내가 지금 어떤 상황에 있느냐에 따라 다르게 읽히는 영화입니다. 저는 OTT에서 다시 한번 볼 생각입니다. 처음 봤을 때와는 또 다른 장면에서 멈추게 될 것 같습니다. 아직 안 보셨다면 지금 당장 찾아보시길 권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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