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시간 30분이라는 말에 겁먹었는데, 막상 보고 나니 더 보고 싶은 영화예요. 중간에 15분 인터미션도 있어서 생각보다 부담 없어요. 인터미션이 있는 영화는 처음이었는데, 감사했어요. 베니스 국제 영화제 은사자상, 골든 글로브 작품상, 아카데미 10개 부문 후보까지 받은 작품인데, 만듦새가 확실히 보장된 영화예요.

이런 영화예요
2차 세계대전 직후, 헝가리 출신 유대인 건축가 라즐로(에이드리언 브로디)가 아내와 조카를 수용소에 남겨두고 혼자 미국으로 탈출해요. 사촌 집에서 가구점 일을 하다 쫓겨나고, 건설현장 막노동을 전전하며 힘들게 살아가요. 헝가리에서는 부다페스트 공공기관 건물까지 설계했던 유명 건축가였는데, 미국에서는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신세가 된 거예요.
그러던 중 과거에 잠깐 리모델링해줬던 서재가 잡지에 소개되면서 부자 해리슨 리 밴 뷰런(가이 피어스)의 눈에 띄어요. 그는 라즐로에게 돌아가신 어머니의 이름을 딴 문화센터 건축을 의뢰해요. 하루 벌어 하루 먹던 일용직 노동자가 거대한 프로젝트를 맡게 되는 거예요. 이후 아내 에르제베트(펠리시티 존스)와 조카 조피아도 부자의 도움으로 미국에 오게 돼요.
자유를 찾아왔는데 또 다른 억압이 있어요
이 영화의 핵심이에요. 라즐로는 자유를 찾아 미국에 왔지만, 부자의 후원을 받는 순간 그 안에 종속되기 시작해요. 건축 방향에 자꾸 태클이 들어와요. 자기가 원하는 브루탈리즘 방식대로 하고 싶은데 압박이 끊이질 않아요. 브루탈리즘은 1950~70년대에 유행한 건축 방식으로, 콘크리트를 노출시켜 실용성과 효율성을 극한까지 끌어올린 양식이에요. 차갑고 투박해 보이지만 그게 라즐로의 예술 철학이거든요.
와이프가 하는 대사가 인상적이에요. 자신이 자유롭다고 오해하는 것만큼 더 노예 상태인 사람은 없다고요. 자유의 나라 미국에 왔지만, 라즐로는 오히려 자본과 권력에 더 깊이 묶여있는 거예요.
선악으로 나눌 수 없는 인물들이에요
부자 밴 뷰런은 단순한 악인이 아니에요. 라즐로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아내와 조카까지 데려오게 도와준 사람이지만, 동시에 은연중에 깔보는 말을 툭툭 던져요. 직접적으로 나쁜 말을 하는 게 아니라 밥 먹다가 갑분싸되는 한 마디, 대화 중에 슬쩍 나오는 말들로요. 아 너랑 얘기하면 지적 자극이 된다, 너 같은 사람은 축복받았어 하면서 실제로는 깔보는 거예요. 이 디테일한 균열이 조금씩 쌓여가요.
라즐로도 완벽한 선인이 아니에요. 아내와 조카를 너무 데려오고 싶어 하면서도 자기 현실이 너무 힘들고, 자유를 찾아왔더니 핍박받는 상황에서 다른 곳으로 풀어내기도 해요. 막상 아내가 왔을 때도 마냥 좋기만 한 게 아니에요. 꿈꿔온 재회인데, 현실은 복잡하거든요. 빛과 그림자가 모두 있는 입체적인 인물이에요.
오프닝부터 연출이 미쳤어요
어두컴컴한 배 안에서 꾸룩꾸룩 거리다가 갑자기 환한 빛과 함께 자유의 여신상이 뒤집혀 보이는 장면으로 영화가 시작돼요. 해방감과 불안감이 동시에 느껴지는 오프닝이에요. 거기서부터 이 영화 잘 만들었다는 게 느껴져요. 옛날 카메라 비스타비전을 사용해서 화면에 클래식한 느낌이 나요. 마치 그 시절을 기록한 영상처럼요.
1막과 2막으로 구성돼 있어요. 1막은 라즐로가 미국에 정착하고 부자를 만나는 과정, 2막은 본격적으로 건축을 하고 아내와 조카가 합류한 후 갈등이 폭발하는 과정이에요. 음악도 독특해요. 화면이랑 약간 안 어울리는 듯한데 묘하게 인물의 감정과 잘 맞아요. 연출은 화려하진 않지만, 웅장할 때 웅장하고 디테일할 때 디테일해요.
총평 - 인물에 푹 빠져드는 영화예요
어렵지 않아요. 그냥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몰입돼요. 사건이 어떻게 전개되는지보다 이 인물들이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서로 영향을 주는지를 보는 재미가 있는 영화예요. 인물 하나하나가 살아있어요. 건축을 몰라도, 홀로코스트 역사를 잘 몰라도 충분히 즐길 수 있어요. 3시간 30분이지만 인터미션도 있고, 끝나고 나서 더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88년생 감독이 만들었다는 게 정말 놀라울 정도로 묵직하고 진한 영화예요. 리클라이너로 편하게 보시는 거 추천해요. 진한 여운이 남는 좋은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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