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저는 박훈정 감독의 '낙원의 밤'을 보기 전까지만 해도 기대가 꽤 컸습니다. 신세계부터 마녀까지 이어진 그만의 독특한 연출 스타일이 이번에는 어떻게 진화했을지 궁금했거든요. 그런데 막상 영화를 보고 나니, 기대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감정이 들었습니다. 2024년에 개봉한 영화가 아니라 10년 전 작품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죠.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이 범죄 누아르는 박훈정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과연 어떤 위치를 차지하게 될까요.

박훈정 감독, 왜 계속 비슷한 길을 걷는 걸까
박훈정 감독을 보면 한 가지 특징이 눈에 띕니다. 바로 꾸준히 작품을 내놓는다는 점이죠. 한 작품이 성공했다고 해서 오래 쉬지 않고 계속 새로운 영화를 준비하는 스타일입니다. 신세계 이후에도 VIP, 마녀 시리즈 등을 통해 자신만의 색깔을 계속 보여왔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번 낙원의 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감독은 발전하는 동시에 무언가를 잃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요.
각본가로서 박훈정은 '악마를 보았다', '부당거래' 같은 작품을 남겼고, 감독으로서는 '신세계'라는 걸작을 만들어냈습니다. 여기서 각본가란 영화나 드라마의 대본을 쓰는 전문 작가를 의미합니다. 하지만 VIP에서 단점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마녀에서는 영화인지 만화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과장된 연출을 보여줬습니다. 제가 직접 그의 필모그래피를 따라가며 느낀 건, 점점 더 일본 애니메이션 풍의 과장된 연출에 기대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낙원의 밤은 이러한 흐름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홍콩 누아르와 일본 영화의 영향을 짙게 받은 듯한 장면들이 계속 나오는데, 정작 그 안에서 박훈정만의 독창성은 찾기 어려웠습니다. 저는 신세계를 극장에서 봤을 때의 그 긴장감과 몰입감을 기대했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그런 느낌을 전혀 받을 수 없었습니다.
10년 전에 나왔어도 식상했을 스토리 구조
이 영화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시대착오적인 서사 구조입니다. 주인공 태구는 거대 조직 북성의 2인자로, 도 회장에게 스카우트 제의를 받을 정도로 유능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너무나 사랑하는 누나와 조카가 있죠. 저는 이 설정을 보는 순간 "아, 이거 사망 플래그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너무 뻔하지 않나요. 주인공이 아끼는 가족이 등장하면 십중팔구 그들이 죽어서 복수의 동기가 되는 게 이런 장르의 공식이니까요.
예상대로 누나와 조카는 차량 사고로 사망하고, 태구는 이것이 도 회장의 소행이라고 믿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도 회장이 태구의 가족을 죽여서 얻을 수 있는 게 뭘까요. 인재는 살아 있어야 가치가 있는 법입니다. 태구 같은 유능한 인물을 자기편으로 만들려면 회유해야지, 가족을 죽여서 원한을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이 부분에서 저는 캐릭터의 동기가 전혀 설득력이 없다고 느꼈습니다. 여기서 동기란 인물이 특정 행동을 하게 만드는 심리적 이유나 목적을 뜻합니다.
영화는 목욕탕 장면에서 태구가 미리 숨겨둔 칼로 도 회장을 살해하는 것으로 전개됩니다. 그런데 이 장면도 너무 허술합니다. 보스가 직접 온 자리고, 그 보스에게 원한을 품은 상대 조직의 간부가 동석한 자리인데, 무기를 사전에 숨겨두는 것을 아무도 확인하지 않았다는 게 말이 됩니까. 영화 '대부'에서 마이클이 레스토랑에 권총을 숨기기 위해 얼마나 치밀하게 계획을 세웠는지 생각해보면, 이 장면은 너무 얄팍하게 느껴집니다.
클리셰의 향연, 그리고 어색한 개그 코드
낙원의 밤에서 가장 참기 힘들었던 건 클리셰의 무분별한 사용이었습니다. 클리셰란 너무 자주 사용되어 진부해진 표현이나 설정을 의미합니다. 제주도로 도망친 태구는 구토 형님과 그의 조카 재현을 만나게 되는데, 재현은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설정입니다. 저는 이 캐릭터를 보는 순간 "아, 태구가 죽은 조카를 재현과 동일시하겠구나"라는 생각이 바로 들었습니다. 너무 뻔한 거 아닙니까.
예상대로 구토 형님이 죽는 장면에서는 전형적인 한국 영화 특유의 감성이 등장합니다. 죽어가면서도 반드시 유언을 남겨야 하는 그 패턴 말이죠. "괜찮아", "고마워" 같은 대사를 하며 조카는 오열합니다. 저는 이런 장면을 한국 영화에서 수십 번도 더 본 것 같습니다. 2024년 영화에서 이런 연출을 또 봐야 한다는 게 정말 지쳤습니다.
더 심각한 건 영화 전체에 흐르는 어색한 개그 코드입니다. 태구는 서울에서 파리를 날리던 조직의 2인자였는데, 제주도에서는 갑자기 순둥이처럼 행동합니다. 재현의 자살 시도 앞에서도 무슨 바보처럼 당황하기만 하죠. 이미 여러 명을 살해하고 온 사람 맞나요. 중간에 캐릭터가 바뀐 것처럼 느껴질 정도입니다. 게다가 영화 내내 등장인물들이 서로의 말을 따라 하는 장면이 반복됩니다. 이게 개그인지 진지한 장면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였습니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마지막 장면입니다. 태구가 죽어가면서 얼굴에 피칠갑을 한 채로 개그를 치고, 재현은 쿨한 척하며 농담을 던집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보며 모골이 송연했습니다. 이게 중2병 아닌가요. 중2병이란 사춘기 청소년이 보이는 과도한 자의식과 허세를 의미하는 표현입니다. 심각한 상황에서조차 쿨한 척, 멋있는 척하려는 연출이 영화 전체를 유치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배우들의 호연도 구하지 못한 허술한 캐릭터
차승원이 연기한 마이사는 카리스마 넘치는 악역이지만, 이미 너무 많이 본 캐릭터입니다. 그나마 드라마 '독점'에서는 개성이라도 있었는데, 마이사는 그저 비슷비슷한 조폭 보스의 복사판에 불과합니다. "우리 계산할 때 남았다"는 말버릇을 달고 다니지만, 정작 계산에 능한 모습은 전혀 보여주지 않습니다. 박과장 역의 임원희와의 긴장감 있는 대결 장면은 좋았지만, 그것만으로는 영화 전체의 허술함을 덮기에 부족했습니다.
태구 역의 배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서울에서는 냉철한 조직원이었다가 제주도에서는 감성적인 청년으로 변하는데, 이 캐릭터의 일관성 없는 모습이 저는 너무 어색했습니다. 제가 실제로 영화를 보면서 가장 아쉬웠던 부분은, 배우들이 워낙 연기를 잘해서 캐릭터를 살려내긴 했지만, 각본 자체가 그들의 노력을 받쳐주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양사장이라는 캐릭터는 더욱 문제입니다. 자기를 따르는 충성스러운 부하들을 적에게 넘기는 인물을 누가 믿고 따르겠습니까. 게다가 마지막에 밝혀지는 "사실은 양사장이 누나를 죽인 범인"이라는 반전도 전혀 놀랍지 않았습니다. 저는 오히려 이게 마이사가 꾸며낸 거짓말이길 바랐습니다. 태구에게 더 큰 절망을 주기 위한 심리전 말이죠. 하지만 그런 깊이 있는 서사는 없었고, 그냥 양사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양아치로만 그려집니다.
한국 범죄 영화는 언제까지 검은색 정장을 입고 달리는 조폭들을 보여줄 건지 의문입니다. 이미 신세계에서 8년 전에 봤던 장면들을 2024년에 또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제주 공항에서 온갖 난동을 부려도 사회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설정, 물회를 먹으며 감성에 젖는 장면, 푸르스름한 색감의 필터까지. 모든 것이 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감의 연속이었습니다. 여기서 기시감이란 실제로는 처음 경험하는 상황인데도 이전에 경험한 것처럼 느껴지는 현상을 뜻합니다.
결국 낙원의 밤은 박훈정 감독이 과거의 성공 공식에 안주한 채, 새로운 시도 없이 만든 영화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솔직히 누구에게도 추천하기 어려웠습니다. 차라리 그 시간에 신세계를 다시 보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으니까요. 좋았던 건 오직 물회 먹방뿐이었습니다. 태구가 처음부터 물회를 먹고 싶어 했고, 누나와의 추억을 이야기하지만, 그런 감성을 표현하기에는 영화의 서사가 너무 얕았습니다. 그래서 물회를 먹는 이미지만 남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