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반란이 성공하려면 몇 시간이 필요할까요? 1979년 12월 12일 밤, 대한민국 군 내부에서 벌어진 쿠데타는 고작 9시간 만에 끝이 났습니다. 저는 영화 '서울의 봄'을 보면서 이 짧은 시간 동안 어떻게 한 국가의 운명이 완전히 뒤바뀔 수 있었는지 믿기지 않았습니다. 실제 역사를 찾아보니 영화보다 더 치밀하고 냉혹한 권력 다툼이 있었습니다.

10.26 이후 권력 공백과 보안사의 부상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시해당하면서 대한민국은 전례 없는 권력 공백 상태에 빠졌습니다. 여기서 권력 공백이란 국가 최고 통수권자가 갑자기 사라지면서 누가 나라를 이끌어야 할지 명확하지 않은 혼란 상태를 의미합니다. 당시 청와대 경호실은 김재규의 총격으로 주요 인물들이 사망했고, 중앙정보부는 부장이 대통령을 죽인 조직이라는 오명으로 완전히 마비되었습니다.
이 틈을 비집고 들어온 인물이 바로 보안사령관 전두환이었습니다. 보안사령부는 군 내부 정보기관으로, 현재의 기무사령부와 같은 조직입니다. 당시만 해도 보안사는 민간 정보까지 수집하는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어서 중앙정보부와 맞먹는 파워를 자랑했습니다. 저는 처음에 이등급 장성인 보안사령관이 어떻게 삼성급, 사성급 장군들을 제치고 권력을 잡았는지 의아했는데, 알고 보니 보안사령관은 대통령과 직접 독대할 수 있는 특권이 있었고 국방장관의 통제도 받지 않는 위치였습니다.
전두환은 박정희 시해 사건의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되면서 수사권까지 손에 쥐게 되었습니다. 경호실과 중정이 무력화된 상황에서 유일하게 작동하는 정보조직이 보안사였고, 전두환은 이 위치를 최대한 활용했습니다. 실제로 전두환은 1961년 5.16 군사정변 당시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을 이끌고 박정희를 지지하는 시위를 주도했던 경험이 있어서, 쿠데타가 어떻게 성공하는지 이미 몸으로 체득한 상태였습니다.
하나회와 군부 장악 계획
전두환의 뒤에는 '하나회'라는 군 내 비밀 사조직이 있었습니다. 하나회는 육군사관학교 11기를 중심으로 영남 출신 장교들이 모인 조직으로, 자신들을 정규 4년 교육을 받은 엘리트라고 자부하며 똘똘 뭉쳤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서울 출신들의 사조직인 '청죽회'를 견제하기 위해 하나회를 키웠고, 전두환과 노태우가 이 조직의 핵심이었습니다.
솔직히 제가 자료를 보면서 가장 놀란 부분은 하나회가 얼마나 조직적으로 군 요직을 장악했는지였습니다. 수도권 방위사령부, 특전사, 공수부대까지 주요 병력을 지휘하는 자리에 하나회 출신들이 포진해 있었습니다. 노태우는 9사단장, 박희도는 20사단장, 최세창은 1공수여단장 등 서울 인근 주요 부대를 거의 장악하고 있었던 겁니다.
여기서 문제가 된 인물이 육군참모총장 정승화였습니다. 정승화는 군의 정치적 중립을 강조하며 전두환과 하나회의 월권 행위를 견제하려 했습니다. 전두환이 정치적 발언을 일삼고 합동수사본부장으로서 권한을 넘어서는 행동을 하자, 정승화는 국방장관 노재현에게 전두환을 동해안 경비사령관이라는 한직으로 보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이 사실이 전두환의 귀에 들어갔고, 그는 대규모 인사 개편 전에 선제적으로 움직이기로 결심합니다.
12월 12일 밤, 9시간의 반란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은 '작전명 상일집산지'라는 암호명으로 군사반란을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상일집산지란 12월 12일에 작전을 개시한다는 의미의 은어입니다. 하나회 핵심 멤버들은 경복궁 인근 수도방위사령부 30경비단에 집결했고, 그들의 목표는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를 체포하는 것이었습니다.
전두환은 정승화가 박정희 시해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을 구실로 그를 공범으로 몰아 체포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복병이 나타났습니다. 수도방위사령관 장태완이었습니다. 장태완은 계엄사령관인 정승화를 체포하려면 반드시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야 한다며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제 생각엔 이때 전두환이 가장 당황했을 것 같습니다. 국방장관 노재현을 미리 확보하지 않았던 것이 큰 실수였으니까요.
설상가상으로 허삼수가 이끄는 병력이 정승화를 연행하러 가던 중 총격전이 벌어지면서 노재현 국방장관이 가족들과 함께 도망쳐 버렸습니다. 육군본부는 정승화 총장 부인의 전화로 상황을 파악하고 즉시 비상령을 걸었습니다. 육군참모차장 윤성민 중장을 중심으로 정규군이 반란군에 맞서기 시작한 겁니다. 장태완은 수도방위사령부 예하 26사단과 수도기계화보병사단을 출동 준비시켰고, 정병주 특전사령관도 9공수여단을 투입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전두환과 하나회는 이미 군의 모든 통신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보안사는 육군본부와 특전사의 명령을 모조리 도청했고, 심지어 26사단과 수도기계화사단으로 가는 전화선까지 끊어버렸습니다. 제 경험상 정보 장악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지만, 이 정도로 치밀하게 통제할 줄은 몰랐습니다. 모든 상황이 반란군의 손바닥 안에서 관리되고 있었던 겁니다.
양측의 공수부대가 서울로 진입하면서 일촉즉발의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정규군 측은 반란군 1공수보다 9공수가 먼저 서울에 도착할 것으로 예상했고, 장태완은 반란군 측에 신사협정을 제안했습니다. "서로 공수를 철수시키자"는 제안이었죠. 반란군은 이를 수락하는 척했지만, 실제로는 1공수를 그대로 서울로 진입시켰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전두환의 냉혹함을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이미 대통령 재가 없이 총장을 연행한 마당에 물러서면 내란죄로 총살당할 판이었으니, 끝까지 밀어붙일 수밖에 없었던 거죠.
1공수는 수도방위사령부 관할이 아닌 행주대교를 통해 서울로 들어와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제압했습니다. 도망쳤던 노재현 국방장관도 결국 붙잡혀 정승화 총장 체포 동의서에 사인을 강요받았습니다.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장태완 장군은 자신의 부하였지만 하나회 소속이었던 신윤희에게 체포되었고, 정병주 특전사령관 역시 자신의 부하 최세창에게 붙잡혔습니다. 작전 개시 9시간 만에 반란군의 완전한 승리로 끝이 났습니다.
서울의 봄에서 광주의 비극으로
12.12 군사반란 이후 전두환과 하나회는 실질적인 군 통수권을 장악했습니다. ROE(교전규칙)를 무시한 이 반란은 헌법에 명시된 군의 정치적 중립 의무를 정면으로 위반한 사건이었습니다. 여기서 ROE란 군이 무력을 사용할 때 따라야 하는 규칙으로, 상급자의 합법적 명령 없이는 발포할 수 없다는 원칙입니다.
전두환은 5.16 군사정변 때처럼 부정축재자들을 잡아들여 국민의 지지를 얻으려 했습니다. 실제로 박정희가 19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를 구성하고 가장 먼저 한 일이 부정축재자 처벌이었고, 1호가 삼성의 이병철 회장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1980년 봄, 민주화를 요구하는 국민들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전두환은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며 정치인들을 연행했습니다.
그리고 5월 18일, 광주에서 시민들이 들고일어났습니다. 전두환은 자신이 장악한 공수부대를 광주로 투입했고, 그 결과는 참혹한 학살로 이어졌습니다. 저는 서울의 봄이라는 제목이 참 아이러니하다고 느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봄이 왔지만 진짜 봄은 오지 않았던 시기, 그래서 '늦깎이 봄'이라는 뜻의 '불사춘'이라 불렸던 거죠. 민주화를 갈망하던 사람들은 "언젠가 이 안개가 걷히고 봄이 올 것"이라 믿었지만, 실제로는 더 긴 독재의 겨울이 시작되었습니다.
영화 '서울의 봄'은 이 9시간의 반란을 긴박하게 그려냈지만, 실제 인물들의 이름을 바꾸고 복잡한 갈등 구조를 단순화시킨 면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회 내부에서도 온건파와 강경파가 있었고, 정승화 총장을 지지하던 군 내부 세력도 더 다양했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전두환과 정승화의 대립 구도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관객의 몰입도를 높였죠. 저는 역사적 사실을 다룬 영화가 어느 정도의 각색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서울의 봄'을 본 후에는 꼭 실제 역사도 찾아보시길 권합니다.
결국 12.12 군사반란은 성공했고, 전두환은 1980년 8월 대통령에 취임해 1988년까지 집권했습니다. "실패하면 반역, 성공하면 혁명"이라는 말이 있지만, 역사는 이 사건을 명백한 군사반란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는 그 어두운 시절을 견뎌낸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 위에 세워진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