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만 봤을 때는 동화 같은 느낌이었는데, 보고 나서 한동안 멍하게 있었어요. 이렇게 착하게 살아온 사람이 이렇게 되는 걸 보면서 화가 나는 건지 슬픈 건지 모르겠더라고요. 단순한 스릴러가 아니에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실함이 무력화되는 현실을 정면으로 찌른 영화거든요. 이정현의 연기가 정말 대단한 영화예요. 관객 4만 명에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은 게 이해되거든요.

이런 영화예요
수남(이정현)은 세탁소, 식당, 청소부, 도우미까지 닥치는 대로 일하며 살아가는 여자예요. 꿈은 딱 하나, 내 집 마련이에요. 남편은 공장에서 손가락이 잘리는 사고를 당한 뒤 우울증과 극단적 선택으로 식물인간이 되어버렸고, 수남은 남편의 병원비와 내 집 마련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위해 혼자 쉬지 않고 달려요. 무료 상담을 받으면서 밥을 먹고,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까지 하면서 9년을 버텨요.
9년을 버텨가며 겨우 모은 돈으로 집을 살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재개발 구역에서 자기 집은 제외되고, 전세금을 올려달라는 집주인, 병원비는 감당이 안 되고, 존엄사 얘기까지 나와요. 아무리 달려도 늘 집값이 먼저예요. 이 영화 제목이 왜 앨리스인지, 아무리 뛰어도 제자리인 붉은 여왕의 세계라는 게 보다 보면 정확하게 이해가 돼요.
그러다 수남은 자신의 길을 막는 사람들을 하나씩 제거하기 시작해요.
이정현의 연기가 진짜예요
이 영화의 전부는 이정현이에요. 착하고 성실한 여자가 점점 살인자로 변해가는 과정을 섬뜩하면서도 연민이 느껴지게 표현해냈어요. 수남이 나쁜 짓을 하는데 미워지지 않아요. 오히려 그럴 수밖에 없었겠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게 이정현의 연기가 만들어낸 힘이에요. 선량한 눈빛으로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 수남의 모습이 너무 오래 남아요.
노개런티로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촬영 스태프들 아침밥까지 사비로 챙겼다는 일화가 있어요. 배우가 이 영화에 얼마나 진심이었는지가 연기에서도 그대로 느껴져요. 관객 4만 명에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이라는 이례적인 조합이 납득돼요. 흥행과 연기력이 이렇게까지 분리된 사례가 드물거든요.
이 영화가 무서운 이유
수남이 살인자가 되는 과정에서 진짜 빌런이 누군지 점점 모호해져요. 공장 사고로 손가락을 잃고 식물인간이 된 남편, 재개발 이권을 두고 주민들을 이용하는 사람들, 병원비가 감당이 안 된다며 존엄사를 권유하는 의사, 시위 서명지를 찢어버리는 동네 토박이까지. 수남을 둘러싼 환경 전체가 빌런이에요.
열심히 살면 보상이 온다는 말이 이 영화에서는 완전히 부서져요. 성실함이 무력화되는 구조, 아무리 뛰어도 집값이 언제나 한 발 앞서 있는 현실이 수남을 그 지경으로 만든 거예요. 화가 나는데 누구한테 화를 내야 할지 모르는 그 답답함이 영화 내내 쌓여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아무리 달려도 제자리인 붉은 여왕의 세계가 이 영화의 진짜 공포예요.
아쉬운 점도 있어요
저예산 독립 영화라 일부 장면에서 연출이 다소 거칠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어요. 후반부 살인이 반복되면서 개연성이 살짝 느슨해지는 것도 아쉬웠어요. 영화 속 잘린 손가락을 얼음에 직접 넣는 장면도 의학적 오류가 지적됐어요. 실제로는 봉지에 넣은 후 얼음에 보관해야 하는데, 직접 닿으면 세포 손상이 생긴다고 해요. 리얼리즘을 추구한 영화에서 아쉬운 부분으로 꼽혀요.
그럼에도 이정현의 연기가 그 빈자리를 충분히 메워줘서 몰입이 끊기지 않아요. 저예산의 한계를 배우의 열연이 완전히 극복해준 작품이에요.
총평 - 지금 나왔으면 핵대박이었을 영화예요
2015년 영화인데 지금 봐도 전혀 낡지 않아요. 오히려 지금 더 와닿는 영화예요. 주거 문제, 빈곤, 아무리 노력해도 좁혀지지 않는 격차. 이 영화가 담은 현실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거든요. 댓글에서 "지금 나왔으면 핵대박이었을 작품"이라는 말이 왜 나오는지 보면 알게 돼요.
단순한 스릴러가 아니에요. 성실하게 살아온 한 사람이 이 사회에 의해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담은 사회 고발극이에요. 이정현 팬이 아니어도, 한국 사회 이야기에 관심 있는 분이라면 꼭 보셔야 할 영화예요. 보고 나서 화가 나는 게 정상이에요. 그 화가 나는 감정 자체가 이 영화가 제대로 된 거라는 증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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