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블 영화를 볼 때마다 "이번엔 또 우주 어디로 가나"라는 생각부터 드는 분이 있다면, 저도 딱 그런 사람입니다. 썬더볼츠*를 보러 간 날도 솔직히 기대보다 의무감에 가까웠어요.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나왔을 때, 후반부에 눈물이 차올랐던 게 아직도 생생합니다. 슈퍼히어로 장르를 빌린 치유물이라는 느낌, 이 한 줄로 이 영화를 설명하고 싶습니다.

마블이 왜 이 캐릭터들을 골랐나 — 배경과 맥락
2025년 4월 30일에 개봉한 썬더볼츠*는 감독 제이크 슈라이어가 연출했습니다. 넷플릭스 시리즈 '성난 사람들(Beef)'로 에미상을 수상한 그 감독이 맞습니다. 처음 이 사실을 알았을 때 "어, 이 조합이 되나?" 싶었는데, 막상 보고 나니 오히려 이 선택이 영화의 핵심 성패를 가른 것 같습니다.
영화의 전제는 간단합니다. 어벤져스가 사라진 세상, CIA 국장 발렌티나(줄리아 루이스드레이퍼스)가 탄핵 위기에 몰리자 자신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요원들을 한 자리에 모아 제거하려 합니다. 그런데 그 요원들이 하필 다들 전직 히어로, 혹은 히어로 인접 인물들입니다. 엘레나 벨로바(플로렌스 퓨), 존 워커, 고스트, 테스크 마스터, 버키 반즈, 레드 가디언이 그들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지점이 있습니다. MCU(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즉 마블이 구축해온 공유 세계관 안에서 이 캐릭터들은 이미 각자의 드라마 시리즈나 전작 영화를 통해 서사를 어느 정도 쌓아온 인물들입니다. 영화가 이들의 과거를 처음부터 설명하는 데 시간을 쓰지 않아도 되는 구조였다는 뜻입니다. 덕분에 러닝타임 127분을 온전히 지금 벌어지는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 캐릭터들을 거의 몰랐습니다. 테스크 마스터가 어떤 배경인지, 고스트가 어디서 나왔는지 전혀 모른 채로 들어갔는데도 막히는 지점이 없었어요. 각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를 영화 초반에 짧고 반복적으로 보여주면서 자연스럽게 파악하게 만드는 연출 덕분이었습니다. 아는 사람은 반갑고, 모르는 사람도 이해할 수 있게 — 이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닌데 제이크 슈라이어는 해냈습니다.
- 감독: 제이크 슈라이어 (넷플릭스 '성난 사람들' 연출)
- 개봉: 2025년 4월 30일 / 러닝타임 127분
- 주요 등장인물: 엘레나, 버키 반즈, 존 워커, 고스트, 테스크 마스터, 레드 가디언, 밥(센트리/보이드)
- 전제: 어벤져스 부재 이후 세계, CIA 국장의 탄핵 위기가 사건의 도화선
공허함을 빌런으로 만든 영화 — 캐릭터 심층 분석
이 영화에서 가장 오래 생각하게 만든 부분은 빌런의 설계 방식이었습니다. 썬더볼츠*의 핵심 빌런은 밥(Bob)이라는 인물인데, 영화 안에서 그는 센트리(Sentry)와 보이드(Void)라는 두 가지 정체성 사이를 오갑니다. 센트리는 자신이 전능하다고 느끼는 상승 상태, 보이드는 모든 것이 공허하고 자신은 혼자라는 하강 상태입니다.
GV(감독과의 대화, Guest Visit) 행사에 직접 다녀왔는데, 그 자리에서 제이크 슈라이어 감독이 밥의 캐릭터 설계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실제로 up-and-down이 극심한 친구에게서 영감을 받았고, 센트리와 보이드를 선악의 이분법이 아니라 한 사람의 서로 다른 면모로 봤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둘 중 하나를 지울 수 없고, 지우려 해서도 안 된다는 거였죠. 이 말을 듣고 나서야 영화의 결말이 왜 그런 방식으로 설계됐는지 완전히 이해가 됐습니다.
정신의학적으로 보면 밥의 상태는 조증(mania)과 우울증(depression)이 교차하는 양극성 장애(Bipolar Disorder)와 매우 유사하게 묘사됩니다. 양극성 장애란 기분이 극단적으로 높아지는 조증 삽화와 극단적으로 가라앉는 우울 삽화가 반복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영화는 이를 슈퍼파워의 언어로 번역해서 센트리(up)와 보이드(down)로 시각화한 셈입니다. 단순히 설정이 독특한 게 아니라, 실제 정신건강 경험을 히어로 서사 안에 진지하게 끌어들인 것입니다(출처: 미국 국립정신건강연구소(NIMH), 양극성 장애 개요).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제 인생에서 아무것도 의미 없다고 느꼈던 시기가 떠올랐습니다. 무엇을 위해 사는지 모르겠다는 감각, 공허함. 영화가 계속 꺼내드는 그 단어가 화면 속 히어로가 아니라 저한테 하는 말처럼 들렸습니다. 후반부에서 보이드 상태의 밥이 스스로를 해치려 할 때 동료들이 막으며 안아주는 장면에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차올랐습니다. 히어로 영화에서 그런 감각을 느낄 거라고는 생각 못 했어요.
이 영화에서 공허함(Void)이라는 개념은 단순한 빌런의 이름이 아닙니다. 쉽게 말해 현대인이 겪는 극도의 무의미감, 고립감, 자기혐오가 물리적 존재로 구현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기는 방식이 더 강한 힘이 아니라 연대와 공개적 나눔이라는 점이 이 영화를 단순한 오락물 이상으로 만듭니다.
마블이 잊고 있었던 것 — 이 영화의 성공 요인과 한계
저는 데드풀과 울버린을 꽤 혹독하게 평가했던 사람입니다. 세계관 딥다이브(deep dive), 즉 마블 세계관 전반에 걸친 심층 지식 없이는 어디서 웃어야 하는지도 모른 채 멀뚱히 앉아 있어야 했거든요. 그게 매니아에게는 선물이지만, 일반 관객에게는 높은 진입 장벽이 됩니다. 반면 썬더볼츠*는 제가 아무것도 모른 채로 들어갔는데도 처음부터 끝까지 막히지 않았습니다.
이 차이가 왜 생기냐를 두고 "서사가 있어서"라고만 설명하는 건 좀 아쉽습니다. 더 정확하게 보면,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이미 이전 작품에서 각자의 서사를 충분히 풀어낸 상태로 나왔기 때문에, 영화가 캐릭터 소개에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아도 됐습니다. 일종의 서사 자본(narrative capital)이 이미 쌓여 있었던 것입니다. 서사 자본이란 관객이 특정 캐릭터에 대해 이미 감정적으로 투자된 상태, 즉 설명 없이도 이 사람이 어떤 고통을 안고 있는지 느껴지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자본을 활용해서 영화는 처음부터 이야기 전개에만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또 한 가지 성공 요인은 능력치의 의도적 하향입니다. 이 팀의 히어로들은 솔직히 말해 강하지 않습니다. 레드 가디언은 그냥 힘센 아저씨 느낌이고, 고스트는 물질을 통과하는 위상 변이(Phase Shift) 능력을 가졌지만 전투력이 압도적이지는 않습니다. 위상 변이란 물질의 원자 사이를 통과하는 능력으로, 공격과 방어 모두 가능하지만 연속 사용이 불안정합니다. 이 하찮음 덕분에 전투마다 긴장감이 삽니다. 캡틴 마블처럼 나타나면 그냥 다 해결되는 구조가 아니라, 한 명 한 명이 낑낑대며 뭔가를 해내는 모습이 오히려 감정 이입을 만들어냈습니다.
물론 아쉬운 부분도 있습니다. 밥이 발렌티나와 몇 번 대화를 나누더니 갑자기 완전히 변해 있는 장면은 제가 보기에도 중간 과정이 생략됐다는 느낌이 분명히 들었습니다. 가스라이팅(gaslighting), 즉 상대방의 현실 인식을 교묘하게 왜곡해 심리적으로 지배하는 과정이 영화 안에서 조금만 더 구체적으로 보였다면 밥의 변화가 훨씬 설득력 있었을 것입니다. 또 고스트는 액션 비중이 있는 것에 비해 감정선이 얇게 느껴지는 편이었습니다. 캐릭터가 많다 보니 어쩔 수 없는 한계이기도 합니다(출처: Rotten Tomatoes, Thunderbolts* 비평 종합).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최근 본 마블 영화 중에 가장 만족스러웠다고 단언합니다. 멀티버스나 타임 트래블 같은 장치에 의존하지 않고, 인물의 내면과 연대로 이야기를 완성한 방식이 오랜만에 "이게 히어로 영화지"라는 감각을 돌려줬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마블 영화를 거의 안 봤는데 썬더볼츠* 봐도 이해가 되나요?
A. 저도 등장인물 대부분을 모른 채로 들어갔는데 전혀 막히지 않았습니다. 영화 자체가 각 캐릭터를 짧고 반복적으로 소개하는 방식으로 설계돼 있어서, 사전 지식 없이도 이야기를 따라가는 데 문제가 없습니다. 알면 더 반갑고, 몰라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구조입니다.
Q. 밥이 갑자기 보이드로 변하는 게 왜 그렇게 빠른 건가요?
A. 감독 GV에서 나온 설명에 따르면, 밥에게는 어릴 때부터 보이드적 성향이 내재돼 있었고, 혈청 투여로 그 측면이 강화된 것이라고 합니다. 선악의 변환이 아니라 한 사람 안의 up-down, 즉 조증과 우울의 교차를 표현한 것이어서 외부 자극에 빠르게 반응하는 것이 설정상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그 과정이 영화 안에서 충분히 시각화되지 않은 점은 아쉬운 부분입니다.
Q. 쿠키 영상이 몇 개인가요, 그리고 끝까지 있어야 하나요?
A. 쿠키는 총 두 개입니다. 영화가 끝나자마자 바로 하나가 나오고, 자막이 모두 올라간 뒤에 하나가 더 있습니다. 두 번째 쿠키까지 놓치지 않으려면 끝까지 자리를 지키셔야 합니다.
Q. 이 영화가 우울증이나 정신건강 주제를 직접적으로 다루나요?
A. 직접 "이것은 우울증입니다"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공허함, 자기혐오, 극한의 고립감 같은 감각이 빌런과 히어로들의 행동을 통해 은유적으로 표현됩니다. 특히 후반부 장면들은 정신적 고통을 겪어본 분들에게 상당한 감정적 울림을 줄 수 있습니다. 저도 그 장면에서 예상치 못하게 눈물이 차올랐습니다.
결론
썬더볼츠*를 보고 나서 드는 생각은 딱 하나였습니다. 마블이 이렇게 만들면 되는데, 왜 이걸 이제야 했을까. 엄청난 스케일이나 화려한 시각 효과 없이도, 캐릭터 한 명 한 명에 결핍과 상처를 부여하고 그것이 쌓여 연대로 이어지는 과정이 히어로 서사의 본질이라는 걸 이 영화는 다시 보여줬습니다.
저처럼 마블에 피로감을 느끼고 있는 분들께 특히 권합니다. 세계관을 공부하지 않아도, 아무것도 모르고 들어가도 괜찮습니다. 그냥 가서 보시면 됩니다. 그리고 자막이 다 올라갈 때까지 자리를 지키는 걸 잊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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